<압축성장 고고학> 중 교육에 대하여

<압축성장 고고학> 중 교육에 대하여

<압축 성장의 고고학>중에서 교육에 대해서 이 글은 2016년 1월 5일에 쓴 글이다.

우리는 교육이 불평등을 해소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읽고 있는 『 압축 성장의 고고학 』에서 다른 주장을 한다.

이 책에서 부르디외는 “학교는 중립적인 기관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불디우은 “학교는 상층과 중산층에게 익숙한 선호나 태도 또는 행위 규범을 보편적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하층 계급의 아이의 언어나 행동 양식은 학교에서 존중되지 않는다”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능력과 재능 자체는 시간과 문화 자본을 투자한 산물이기 때문에 경제학자들은 교육 체계가 문화 자본의 세습을 후원함으로써 사회 구조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을 인식할 수 없는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가족 단위에서 아이의 학업 성취를 돕는 기능적 조직이 아닌 불평등의 기원이다”(이상 99쪽)라는 것이다.

최근 서구에서는 “교육 팽창이 사회 경제적으로 불리한 계층에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불평등을 낮춘 것?”에 대한 연구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한국의 일반적인 인식과는 큰 차이가 있다.

연구 결과”확대된 고등 교육 이수는 명확한 프리미엄, 즉 기대 이상의 수익을 가져투자”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예컨대 1980년 이후 미국에서는 대졸과 고졸 근로자의 소득 격차가 커졌다는 것이다”(121쪽)이에 대해서 월터스는 “학교 교육의 팽창이 20세기에 있던 가장 중요한 교육 개혁이다”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육 시스템의 지속적인 확대는 교육 공무원과 엘리트 집단이 더 많은 교육 기회에 대한 사회적 약자의 압력을 받아들인 것으로, 교육의 형평성, 공평성, 더 큰 사회적 계층 이동의 가능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충족한 것이지만 그 과정은 기존의 교육 시스템이 사회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사회 집단에 제공하고 온 편익을 근본적으로 훼손하지 않는 방식이었다또 이에 대한 저자는 “교육은 사회 정치적 질서를 유지하기로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정권의 특성은 교육 정책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고 말했다.

(이상 123쪽)정권과 교육 정책이 긴밀하게 연결되는 사례는 수없이 보아 왔다.

특히 이번 교과서 국정화 과정에서 정권의 교육 목표가 결코 가치 중립적이 아님을 적나라하게 보였다.

저자는 먼저 말한 이유로 한국의 수요에 대한 기회 확대 차원에서 만들어진 고등 교육 확대 즉 대학의 양산은 결과적으로 “이미 사회 경제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기회와 선택권을 가진 결과를 만든 “이라고 주장한다.

(130쪽)이번 이 책을 읽으며 교육에 대해서 기존의 관념을 재검토할 기회를 얻었다.

결국 교육도 사회 시스템이다.

시스템을 잘 관리하면 결국 모든 시스템은 시스템을 유지하는 기득권 세력에 유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일류 고등 학교를 없애고 교육 부담을 없애고 교육을 정상화한다는 명목으로 평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런 일을 무력화시킨 것이 특목고는 것이다.

이 특별 목적 고등 학교도 처음 시작은 매우 순수했다.

그러나 힘이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이 허점을 파고들고 이 제도를 왜곡시키고 결국 다시 일류 고교의 부활을 가져왔다.

앞서고 윌 타스가 말한 그대로”사회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사회 집단에 제공하고 온 편익을 근본적으로 해치지 않는 방식”에 회귀한 것이다.

교육이 모든 것을 풀어 주지 않는다는 사실… 그렇긴이번 기회에 분명히 확인했다.

추신:이 책에서 말한 교육에 관한 내용은 다음의 링크한<학교의 재발견>을 읽어야 확실한 비교가 가능하다.

근대 이전은 교육이 상류 사회의 전유물이었다.

근대 국민 국가의 출현에 따른 근대 교육은 국가가 요구하는 수준의 국민을 키우기 위한 보통 교육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20세기까지는 보통 교육의 효과가 신분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고도화하는 습득하는 지식이 많아지면서 다시 교육에 막대한 투자가 이뤄져야만 가능한 구조가 됐다.

그래서 교육에 투자할 수 있는 조건으로 격차가 벌어진 것이다.

우리의 과거에도 그랬다.

조선 시대의 교육은 한자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투자가 있어야 가능했다.

그래서 공부에 매진할 수 없는 사람은 당연히 뒤처지게 된다.

현대 교육은 조선 시대의 교육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기본 교육 없이는 더 공부할 수 없다는 것이 전제이다.

이것이 전제라고 하면 결국 학교 교육이 교육 불평등을 어느 정도 해소한다는 얘기도 옳다.

그러나 지금은 이를 초과한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우리가 원하는 교육 목표가 교육을 통한 불평등 해소라면 교육에 대한 투자에 대한 혜택을 빈부와 상관 없이 받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아니냐?못 버는 사람이 교육에 대한 투자가 더 진행되기도 한 방법이 될 것.<학교의 재발견>을 읽고 https://blog.naver.com/seongho0805/223269771437